죽거나 크게 다쳐도 가해자 불구속 급증… 사과·연락도 안해
중대과실 있어야 영장… 구속 건수 5년새 절반 줄어
가해자 “어차피 벌금·집유… 피해자가 알아서 해라”
박란희 기자 rhpark@chosun.com
- 지난 4월 16일, 이모(18·고3)군은 서울 용산의 한 고등학교 앞 스쿨존(School Zone)에서 왕복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다 직진하는 차량에 치였다. 운전자는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시속 50~60㎞로 달려오다 사고를 냈다. 이군은 왼팔과 다리에 전치 3개월 부상을 입고, 수술 후 20일 넘게 깁스를 해야 했다. 5월 초 등교를 했지만, 두통이 너무 심해 다시 학교를 쉬어야 했다. 병원에선 “사고 후유증이라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고 했다. 전교 1~2등을 다투던 이군은 올해 대입(大入)마저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이군의 어머니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한 후 아들 간호에 매달리고 있다.
이군과 어머니를 더욱 속상하게 하는 건 가해자의 태도다.
이군의 어머니는 “가해자는 형사 합의금 300만원을 제시한 후, 합의 안 돼도 어차피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니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온다”며 “우리 아들은 교통사고 때문에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가해자는 거의 죗값을 받지 않는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뻔뻔해지는 가해자들=교통사고 가해자에 대한 불구속 수사·재판이 늘면서,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교통사고 가해자 중 구속된 경우는 2000년 1만5344건에서 2005년 8539건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처럼 구속이 급감하자 가해자들은 사망사고를 내고도 피해자 유족(遺族)에게 사과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형사 합의금 대신 법원에 공탁금을 내놓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면 보험회사에 청구해서 공탁금을 도로 받아가곤 한다.
지난 5월 7일 이명철(42·전남 해남)씨의 초등학교 1학년생 아들이 하굣길에 1t 트럭에 치여 숨졌다. 이씨의 아들이 왕복 2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한 과실이 인정돼 가해자는 불구속 입건됐다. 하지만 이씨는 아직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기는커녕 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가해자의 변호사는 합의금 2000만원을 제의해 왔지만, 이씨는 합의하지 않았다. 이씨는 “이런 사건 겪고 나니까 ‘아, 사람을 죽여도 우리나라에선 아무렇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악용되는 공탁금 제도=가해자들은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며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제시하고, 합의에 실패하면 대부분 법원에 공탁금을 낸다. 피해자에게 줄 수 있는 돈을 맡겨놓을 테니 이 점을 정상참작해서 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공탁금 제도가 악용되는 사례가 많다. 재작년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김모(35)씨는 가해자측으로부터 얼마 전 소송을 당했다. 가해자가 내놓은 공탁금 3000만원을 김씨가 가져간 것은 부당이득이니 도로 내놓으라는 소송이었다. 김씨는 1심에서 졌다. 20대 여대생인 가해자는 2005년 3월 부모님의 외제차를 몰고 올림픽대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출근하던 김씨 남편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김씨는 졸지에 세 자녀를 둔 미망인이 됐다. 가해자는 1심에서 2000만원, 2심에서 1000만원을 공탁했다. 김씨는 당시에 ‘처벌을 더 중하게 해달라’면서 공탁금을 포기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공탁금이 정상참작돼 항소심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김씨는 공탁금을 가져갔고, 이에 가해자는 “처음에 공탁금을 포기한다고 했으면서 왜 가져갔느냐”며 공탁금을 다시 내놓으라고 소송을 건 것이다.
한문철 변호사는 “몇 년 전부터 사망사고라고 해도 음주운전 등 중대한 과실이 인정돼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때문에 이를 악용해 피해자측과 연락 한 번 없이 1000만~2000만원의 공탁금 통지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도 많다”며 “가해자의 인권만 중시되다 보니 연간 수십만 명에 달하는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역차별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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